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1세(예루살렘 왕국)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국왕. [[라틴 제국]]의 선임 공동 황제 겸 섭정.[*a 라틴 제국의 나머지 공동 군주인 [[보두앵 2세(라틴 제국)|보두앵 2세]]의 공동 황제 지위까지 섭정했다는 의미이다.]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은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와 결혼으로 예루살렘 공동 왕이 되었고 훗날 라틴 제국의 보두앵 2세의 섭정이 되었다. 장 드 브리엔은 브리엔 백작 에라르드의 차남으로 프랑스 [[필리프 2세]]에게 발탁되어 1210년 예루살렘 여왕 몬페라토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예루살렘의 공동 왕이 되었다. 그는 6년 간 끌어오던 이슬람과의 휴전 협정을 결론 냈으며, 1212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그녀를 이은 딸 욜랑드([[이사벨 2세(예루살렘 왕국)|이사벨 2세]])의 공동 왕 지위까지 섭정하여 사실상 단독 통치자로 예루살렘을 다스렸다.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아르메니아의 공주와 재혼했다. 제5차 십자군 기간 동안 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. 그러나 1225년 마리아가 낳은 딸 욜랑드가 [[신성 로마 제국]]의 [[프리드리히 2세]]와 결혼하자 곧 황제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예루살렘 왕권을 주장하며 장인인 장을 폐위시켜 버렸다. 그는 예루살렘의 왕위에서 쫓겨나 로마로 가서 교황 [[호노리오 3세]]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령 토스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. 그는 사위인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하는 등 사위에 대한 복수를 했다. 1228년 그는 라틴 제국에서 황제의 섭정을 맡으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어린 딸 마리와 라틴 제국의 어린 황제 보두앵 2세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기로 했다. 1231년 이미 80에 가까운 나이로 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공동 황제 겸 섭정이 되었다.[*a] 그는 왕성한 원기를 과시하며 노구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[[이반 아센 2세]]와 니케아 제국군을 상대로 싸워 1235년 물리치기도 하였다. 그러나 1237년 3월 장은 죽었고 사위인 보두앵 2세가 단독 군주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